순천 조계산 산행
**조계산 산행**
-.일자 : 225년 6월 11일
-.코스:선암사주차장-향로암터-장군봉-장박골갈림길-연산봉사거리-장박골-보리밥집-큰굴목재-작은굴목재-선암사-선암사주차장
(14.6km / 5시간 50분)
한 번씩 다녀오는 여행은 기다림 속에서의 설렘이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자극제가 되었지만, 요즘은 해가 뜨면 일터에 나가고 해가 지면 보금자리로 복귀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평온함이 더 좋다.
생활 반경이 좁아지면서 여행이 주는 특별함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안정감과 잔잔한 행복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데, 생체시계는 게으름을 피워도 될 휴일 아침마저도 여지없이 나를 깨운다.
어제 집사람에게 가볍게 툭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분위기가 냉랭하다. 옆에 있으면 보기 싫은 게 남편이라는데, 물병 하나 챙겨 다녀올 수 있는 조계산을 피난처로 삼는다.
나의 순간적인 기지에 스스로 대견해하며, 일상 운동인 가야산을 다녀오는 듯 현관을 나서니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현충일 연휴의 뒤끝이라 그런지, 드넓은 주차장에 내리꽂는 레이저 같은 햇살이 하도 좋아서 보리라도 말렸으면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녹음이 드리워진 넓은 진입로에 기분이 상쾌하다. 요즘은 우리의 일상이 회복된 것 같아 마냥 기분 좋은 날들인데, 졸졸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반주가 되어 허밍이 절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출발이다.
이른 시간이라 선암사에는 인적이 없고, 겹벚꽃의 화려함도 한 시절로 사라진 산사는 고요함만이 깊게 깔려 공양관마저도 인적이 없다.
나만이 유일하게 적막한 정적을 깨고 대각암을 향해 오른다.
목조건물이 세월의 흐름에 빛이 바래 처음엔 폐가쯤으로만 여겼던 대각암이였는데 지금은 아늑한 암자로 느껴지고, 수행 중인 스님의 독경이 흘러나온다.
나 홀로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번뇌를 내려놓는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울창한 숲은 햇살을 완벽하게 차단하여 모자를 쓸 필요가 없다. 빈틈을 노린 날파리들로부터 무한 공격을 받는데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귀에 윙윙거리고 눈에 아른거려 귀찮다.
눈앞에 비문증처럼 돌아다니는 날파리들은 눈 한 번 깜빡임으로 퇴치해 버린다.
오늘은 이 산속에서 오랫동안 머물고자 천천히 오르는데도 몸의 저항에 피부가 끈적거리고 땀이 옷을 적시고 있다.
선풍기 날개 같은 바람이 연신 불고 있어도 나의 자체 발열량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어, 향로암터의 샘물로 냉각수를 주입하고 심장 엔진을 아이들링 시켜 과열을 방지한다.
정상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고도를 높여 공기층이 달라졌어도 바람에 나뭇잎만 흔들릴 뿐 시원함이 없어 땀에 젖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정상을 밟는다.
정상은 고요하고, 우주의 공간인 듯 세상의 소음이 모두 사라진 듯하다.
나무는 시나브로 자라 승주호를 가렸고, 북사면으로 펼쳐진 파노라마 속에는 어머니의 젖꼭지와 같은 관측대의 모후산과 풍력발전기 너머로 무등산이 펼쳐져 있다.
나는 푸르른 물결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유영한다. 모든 생명체를 품은 숲의 포용성에서 어머니와 같은 편안함을 찾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숲속에서 안식을 찾는다. 혼자만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지만, 침묵 속에 내 몸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지금이 참 좋아 나는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다.
접치재의 등로가 합쳐진 산길이 산죽 사이를 지나고, 계단을 따라서 동네 마실길처럼 이어진다. 이렇게나 정성 들여 등로를 가꾸어 놓았는데, 나라도 찾아와서 몸 튼실하게 만들고 열심히 일해 세금을 내줘야 한다.
눈 오는 날 장박골 내림길로 무심히 내려섰다가 무릎까지 빠져 들어 혼쭐이 났었는데, 숲에 등로가 가려졌다.
아늑한 녹음의 숲과 푹신한 등로가 동네 마실길처럼 부드럽게 이어진다.
함께할 산 친구가 없기에 홀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녹음으로 가득 찬 산길에 산새 소리만 들려오는 고요함 속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으니, 나도 이제는 산신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푸르름은 안정감이다.
송광사 갈림길의 쉼터이고, 장박골의 내림길이다.
정상선호로 연산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흐름을 패스하여 장박골을 향해 내려선다.
미답지였던지 낯설지만, 마른 계곡은 장박골에서 합류되어 만물에게 생명수를 제공하면서 주암호로 흘러 들어간다.
요즘 새끼발가락의 퇴업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는데, 긴 계곡길에서는 파업이 될까 봐 몸이 보내는 신호에 절로 반응하게 되어 이래저래 어렵다.
계곡을 따라 보리밥집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 독상을 받는다.
집 나와서 이런 호사도 없다. 그릇을 모두 비우고 다방 커피의 향기에 방전되었던 감성을 충전시킨다.
포만감에 작은굴목제의 돌계단은 지옥훈련장이 되지만 매번 반복될 뿐이다.
선암사로 곧바로 내려가는 내림길이 돌길로 고달파 오늘은 무릎의 통증을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작은굴목제로 이동하여 선암사로 내려간다.
정상이나 보리밥집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 몰라도, 선암사에서 이곳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아 몇 번 오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억을 재생시켜서 지형지물과 퍼즐을 맞추어 가지만 역시나 기억은 휘발되고 변질되어서 걷는 것만이 현실이고, 몸은 점차 적응하며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진다.
숲은 원시림처럼 나무의 듬치는 한아름이 넘고, 그 끝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편백나무 군락지에 와상의 쉼터가 있어 몸을 뉘어 본다.
높이 치솟은 나뭇잎새의 틈새로는 하늘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고 푸르기만 하여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기들이 일으켜 세운다.
어쩔 수가 없다. 더 이상 머물 데도 없고, 이젠 하산을 해야지...
오늘도 일상의 운동과 삶의 여유를 찾아 나섰지만, 나의 삶에 정격 속도는 정하지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