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6년 지리산 바래봉 철쭉산행

camsang 2026. 5. 13. 13:20

** 지리산 서부능선(성삼재-바래봉) 종주 **

-.일자 : 2026년 5월 10일

-.코스 : 성삼재-만복대-정령치-고리봉-세걸산-바래봉-구인월(23km / 7시간)

 

마구 피어 나던 봄꽃들이 장미라는 여왕의 화려한 등극에 밀려 서둘러 자취를 감추는 계절, 그 끝자락을 붙잡고 싶은 조급함에 덜컥 산행 공지에 댓글부터 달았지만 막상 산행 당일이 되니 게으름을 피우며 온갖 핑계거리를 찾는다.

 

 


때로는 찰나의 충동적인 결정이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상은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된 사람의 몫이라고. 막상 성삼재에 올라 장쾌하게 펼쳐진 지리산의 능선을 마주하니, 핑계로 가득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머릿속까지 청량하게 씻겨 내려간다.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군중심리 때문이었을까? 애초 정령치에서 출발해 팔랑치 철쭉의 향연 속에서 오월의 축제를 즐기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서부능선 종주가 되어 버렸다.
어쩌겠는가? 머리의 명령을 따르느라 몸은 고되겠지만, 산행의 끝에서 마주할 성취감이 그 고단함을 충분히 달래주리라 믿는다.

 


참 오랜만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찾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마치 자동 입력된 정보가 출력되듯 산길을 자연스럽게 이어 간다.
이 사람들 괜히 여길 택한게 아니였다. 내리자 마자 내달리기 시작한다.
첫사랑을 마주한 듯 가슴이 두근거려야 하건만, 대열을 따르느라 거친 숨만 몰아쉰다. 그래도 고산지대의 서늘한 바람이 달뜬 호흡을 다독여 준다. 갓 돋아난 새싹의 싱그러움 사이로 연달래가 곱게 피어나 길을 환히 밝힌다.

 


상위마을에서 올라오는 당동고개에 닿아 고리봉에 올라선다. 등산로가 무척이나 잘 정비되어 있어 오히려 생소할 정도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동호인들을 숲은 칭얼거리는 아이 달래듯 품어 주었고, 덕분에 사색에 잠겨 등산 본연의 의미를 되찾는다. 상위마을에서 올라오는 묘봉치에 다다랐다. 이곳은 지리산에 눈이 내리면 그 설경이 몹시도 그리울 때 찾는 곳이다.
저 멀리 만복대가 굽어보고, 세상을 다 품을 듯 반야봉으로 뻗어 나가는 지리의 장쾌한 능선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산길이 좁아 기차놀이가 이어진다. 추월할 수도 없어 앞사람의 꽁무니만 가만가만 따라 만복대에 올라선다. 짙푸른 심해 같은 뱀사골 계곡과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 등대처럼 솟아 있는 만복대. 이름만으로도 만복이 깃들 것만 같다.




정상 인증을 하는 사이 길잡이하던 산님이 먼저 내려가기에 잽싸게 앞질러 내려온다. 꽃잎을 한껏 치켜올려 요염함을 뽐내는 얼레지가 지천이라, 수분을 자처하며 그 눈을 맞추면서 내려간다.

 


산속이 얼마나 고요한지, 올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마저 헤아려질 정도다. 앞서간 달려가 버린 사람들 덕분에 오롯이 나만의 사색에 잠기려 하면, 신발 끝에 툭툭 걸리는 돌부리가 현실로 정신을 일깨운다. 
건강하자고 온 길, 다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뚜벅뚜벅 하산한다. 뚜벅뚜벅 내려와 정령치 터널 위를 넘어 휴게소를 지나친다.
재정비된 이후로 한 번도 찾지 못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먼저 내려온 후배가 기다리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제부터가 내가 계획했던 '웰빙 산행' 코스다
갓 돋아난 연둣빛 잎사귀들은 아직 햇살을 가리기엔 역부족이라, 내리쬐는 볕이 제법 따갑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리봉을 향해 오른다. 

 


초록의 숲 사이로 꽃망울을 맺은 철쭉이 눈길을 끌지만, 산 정상의 풍경을 완성하기에는 아직 이른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산객들이 많아졌다. 다시금 기차놀이가 시작된다. 등산로가 좁아 추월도 못한 채, 앞사람들의 사생활과 무용담을 고스란히 들으며 걷는다. 다행히 곱게 물든 연달래가 가로등처럼 듬성듬성 피어 있고,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그 소음들을 정화해 준다. 

 


거친 듯 완만하게 이어지는 등산로는 거리 주리기용인 듯 특별한 경치도 없이 단조롭다. 
세걸산을 바라보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옛 기억으로는 전북학생수련원에서 올라오는 세동치가 나와야 할 텐데, 어느새 정상석이 있는 세걸산에 올라서게 되고 전망 데크까지 설치되어 있다.
반야봉을 바라보는 조망은 좋지만, 따스한 햇살에 몸을 말리기는커녕 마치 소금을 생산하듯 땀이 흘러 쉴 수가 없다. 이쯤에서 점심을 먹으면 좋으련만, 일행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고 사람들의 행렬만 길게 이어진다. 

 


내리막길이 급하다. 식수를 보충하고 올라오는 일행들과 합류해, 샘터 가까이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는다. 내놓은 반찬 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남은 삶을 위해 선뜻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후배의 말은, 재채용으로 여전히 회사에 연줄을 대고 있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가 선두 팀인 줄 알았는데, 다른 동호인들이 이미 점심을 먹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처럼 꾸준함이 이긴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아하, 세걸산을 넘어서야 비로소 세동치구나. 한낮의 정적이 몸을 지치게 만들고, 모처럼의 장거리 산행이라 발바닥이 따끔거린다. 
오가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은 나를 비추어 보고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된다. 
옛 영웅담은 그저 지나간 이야기일 뿐, 지금 나의 현실은 여린 여성보다도, 나이 든 노부부보다도 못한 저질 체력이 되어 걷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팔랑치 오름길이 참 고되다. 땅이 메말라 먼지가 폴폴 날리고, 앞에서 내려오던 산객이 미끄러져 썰매를 타는 모습에 내가 다 민망해진다. 
모자에는 하얀 소금기가 지도를 그렸고, 점심때 물을 보충하지 않았더라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목말라하는 동호인들에게 생명수를 건넨다. 오지랖이라기보다는 바래봉 아래 샘터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뱀사골

 


헬기장에서 조망한 바래봉은 새빨갛게 불타올라야 하건만, 사람만 가득하다.
철쭉 군락지가 왜 이래?' 나무는 메말라 있고 꽃은 보이지 않는다. 숲에 잠식되어 이곳이 철쭉 군락지인지조차 의문스럽다.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산객들이 마냥 부러울 뿐, 철쭉꽃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하다.
마주하는 풍경에 대한 감상은 각자의 몫이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정성을 다해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팔랑치 임도를 따라 걷는다. '산상의 화원'이라 불릴 만큼 고도가 높음에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이곳은, 대한민국 대표 철쭉 군락지임을 증명하듯 삼거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맛보기 풍경을 내어준다. 
내 눈에는 마치 스위스풍의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줄을 서서 식수를 보충하고, 빤히 보이는 오름길을 향한다. 겉보기와 달리 오름길은 의외로 고되다. 
점점이 군락을 이룬 철쭉들은 목책 안에 보호되고 있어, 마치 가축을 사육하는 듯한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오르는 자와 내려오는 자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리는 오름길의 정점, 정상석을 배알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살며시 비켜선다. 이곳에서 용산 주차장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덕두봉을 향한다.

 


이곳은 아마도 태극종주 이후 처음인 듯싶다. 그때는 피 끓는 청춘이었는데, 어느덧 퇴직을 하고 다시 찾으니 모든 것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예전엔 오지 산행로였던 곳이 이제는 야자매트까지 깔려 호사스럽기까지 하다. 
숲은 우거지고 녹음이 짙은 등산로는 더없이 시원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지쳐가는 육신에 산소를 공급하며 회생시키는 듯하니, 그 바람 한 점이 더없이 소중하다.
자그마한 오름길에도 곧바로 고통이 전이되고, 발가락은 굽어진 채 펴지질 않는다. 

 


숲 한가운데 우뚝 솟은 덕두봉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참나무 군락지의 나뭇가지들이 한 가족처럼 뭉태기로 치솟아 있어 마치 집성촌을 보는 듯하고, 우람한 소나무 군락지를 벗어나니 벌목된 개활지의 우회로가 이어진다. 

 


마을이 보이고, 조금씩 기억이 싹트는 인월 마을의 돌담은 옛 삶을 회상하게 한다.
드디어 인월 마을회관에 도착한다. 
지금의 나에게 산행이 단순한 철쭉산행을 넘어 하나의 '도전'이 되어버렸지만, 역시나 성취감은 있다. 

 


마을회관에서 화장실을 개방해 준 덕분에 샤워기 아래서 소금기를 닦아낸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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