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광양 백운산 종주(가을의 고요함에 물들다)

camsang 2026. 9. 20. 16:52

*** 가을빛의 따라 걷는 백운산, 고요함에 머물다 ***
일자: 2026년 9월 15일
코스: 진틀-진틀삼거리-정상-주능선-억불봉 헬기장-노랭이봉-동동마을(12.3km, 5시간 2분)

광양전어축제가 끝이 났지만 치솟은 전어의 몸값은 떨어지 않고 키로당 4만5천원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을맞이로 전어는 먹어 줘야 한다.

 


매일 한 가지 음식만 집중적으로 먹는 편식은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 음식의 균형을 맞추려면 영양사가 필요하듯, 몸에도 주기적인 운동과 관리가 필요하여 가야산만 맴돌고 있는 나를 살리기 위해 백운산으로 밀어내는 듯하다.

산정의 선선한 바람, 등로에 피었을 갈꽃도 궁금하다.


하산 시간에 구속받기 싫어 동동마을에 차를 세워 두고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나왔지만,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전에 오전 7시에 출발하는 시내버스가 승객이 없다는 이유로 정차하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에 버스를 놓친 경험이 있어 일찍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버스가 자연휴양림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그늘에 있으면 선선한 가을 날씨가 느껴지고,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조용하기만 한 동동마을은 마을의 소멸이 염려될 정도다. 버스가 도착했지만 역시 나 혼자다.

진틀에서 내리니 호출택시를 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이 계류에 씻겨 가듯 계절은 사람들을 밀어냈지만, 백운산 자락의 푸르름만은 여전하다. 

 

백운산이라는 이름값을 하듯 하늘금은 흐린 물감처럼 경계를 지워 놓았다. 녹음이 내려앉아 초록과 동색이 된 계곡에서는 청아한 물소리가 심장의 박동을 삼킨다.


식탁에 놓인 꽃 한 송이가 분위기를 살리듯, 펜션에는 붉은 꽃무릇이 피어나 손님을 기다리는 듯하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데 운영이 될지 염려스럽다. 

 

우리의 공동 자연 자산인 계곡의 소(沼)를 사유화해 영업하던 산장은 이번 정부의 계곡 정비 사업을 잘 견뎌 냈는지 모르겠다. 복날에 살아남은 수탉의 위풍당당한 모습 아래, 닭들은 꼬꼬거리며 경계심 없이 먹이를 쪼고 있다.

 


하늘이 흐린 것인지 녹음 때문인지, 햇살이 들지 않는 등로가 우중충하다. 젓가락처럼 가늘었던 고로쇠나무의 우듬지가 이제는 한 아름씩이나 되니, 자연의 회복력은 참으로 위대하다.
나무가 고목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듯, 여태껏 잘 사용해 온 육체도 관절이 예전 같지 않으니 삐걱거리고 행동거지가 부자연스럽다. 자동차를 관리하듯 몸을 관리해 왔음에도 세월과 연식은 어쩔 수 없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만이 정직함을 증명하며 진틀삼거리에 이른다.

 


신선대 방향에는 안전띠가 무지막지하게 쳐져 있어 감히 넘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일전에는 느슨해 정비 상태라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녹지과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니 무더위로 지연되었던 공사가 재개되어 출입을 금지해 놓았다고 한다. 멧돼지도 접근하지 못할 만큼 막아 놓았지만, 이제는 하지 말라면 안 한다. 연륜을 통해 지혜를 깨닫듯, 그것이 마음 편히 오래 사는 비결임을 체득했다.

 

광양동천의 원류가 되는 계류가 등산로를 가로지른다. 이렇게 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올라야 할 고도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 에베레스트 빙하를 녹이 범인이 등산객의 소변이란 분석도 있는데 줄어든 수량을 보태듯 땀을 뚝뚝 흘리며 오름길을 오른다.


어제 심해처럼 끝없이 펼쳐졌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며 나를 유혹하던 바람이, 밀당이라도 하듯 싹 사라지고 우중충함만 남겨 놓았다. 힘들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몸의 저항이 더해지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자유롭게 길을 나서 산행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롯한 고요함과 평화가 마음에 깃든다.
땅만 바라보고 걸어도 어느쯤 왔는지 가늠할 수 있지만, 병아리가 물을 한 모금 마시듯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의 피로를 달랜다.

 

 

오소리에게 전용 화장실이 있듯 나에게도 정해진 쉼터가 있다. 긴 계단참에서 잠시 쉬며 현재의 나를 점검해 보지만, 홀로 산행하다 보니 기준이 없어 매번 자체 합격처리다.

 


주능선의 가는사초는 염색한 듯 누렇게 변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고, 가을꽃들은 눈을 즐겁게 한다. 홀로 산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상에는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다. 정상에 올라서자 빈 의자를 내어 주듯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한 사람만 남았다.
이분은 서울에서 400km를 운전해 이곳까지 왔고, 이어 100대 명산인 천관산도 찾을 예정이라고 한다. 나이가 일흔을 넘었어도 여전히 청춘이다. 동안인 모습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땀으로 끈적해진 피부에 날파리들이 달라붙고 눈앞을 선회하며 낯선 이를 경계한다. 그래도 정상에 올랐으니 볼 것은 봐야 한다. 자칭 ‘지리산 전망대’라지만 지리산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단풍은 아직 이곳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정상 아래 전망 데크는 재정비를 마치고 새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출입이 막혀 있을 신선대 방향으로 이어진 울퉁불퉁한 산릉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최고점에 올랐으니 이제부터는 윙슈트처럼 인간 새가 되어 정상 고도를 유유히 유지하며 내려서면 된다.

 


주능선의 등로는 수풀과 함께 잘려 나간 야생화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조상 묘를 벌초하듯 말끔하게 제초되어 있다. 덕분에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몸이 가볍고 기분이 좋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전형적인 가을날의 분위기 속에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 기분은 백운암 갈림길까지다.
경계선을 넘자 수풀이 등로를 침범하고 거미줄이 엉킨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을 것 같은 자연은 온갖 꽃을 피워 내고 있지만, 아직은 수줍은 단계라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인다.

 


바위 조망처에서 백운암을 내려다보며 점심을 먹는다. 아내의 정성에 건강한 육체의 식욕까지 더해지니 어느 음식보다 맛이 좋다. 푸른 대양의 잔잔한 바다처럼 펼쳐진 숲과 첩첩이 이어지는 산 능선의 풍경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산채 정식이다.
백운암까지 도로가 확·포장되어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오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푸른 나뭇잎으로 그늘진 등로는 산책길 같다.

 

 밥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가끔 거미줄을 걷어 내고 뱀에 놀라 공중 부양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나 긴장감 없이 걷는 것이 힐링이라면 밥을 먹고 그냥 걷는 것 또한 나를 치유하는 행위다.
큰 고난을 겪은 후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삶의 의미를 깨달은 것과 다름없다. 

 

 

한 번 올라챈 고도를 유지한 채 억불봉 삼거리에 이른다. 쉼이 없었기에 평상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평온함이 참 좋다.
내림길에 무릎이 시큰거리고 발부리가 돌에 채이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산행의 피로다. 노랭이재 수련관 갈림길은 수련관에 숙박할 때마다 찾는 일상적인 운동 코스다.

 

 

 


억새가 피어나야 할 노랭이봉 오름길은 숲의 자생으로 나무들이 자라나 숲 터널을 이루었다. 노랭이봉은 언제나 옛 산악회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라 찾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내려오는 길은 만만치 않은 급경사다. 순식간에 고도를 낮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릎 관절과 발가락의 통증을 감수해야 한다.
수련관 임도에 내려선다. 동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밤나무와 고사리밭이 있어 늘 망설였는데, 지금이 밤 수확철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거미줄을 걷어 내며 내려선 등로 주변의 밤나무밭은 묵어 있었고, 고사리밭은 숲이 되어 있었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흔적은 물론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동동마을에는, 빨갛게 익어 가는 석류와 감만이 세월과 교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