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처럼 백운산 산행 **
-.일자 : 2025년 5월 23일
-.코스 : 한재-신선봉-상봉-억불봉 삼거리-노랭이봉-동동마을(11.2km / 4시간 16분)
요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비가 오지 않는 오늘, 지금 당장 백운산 산행을 나서며 친구들 톡방에 알림을 한다. 마침 백운산 지킴이인 참수리가 도솔봉 정비를 한다고 하여 한재까지 차로 올라가 버렸다.
같이 산행을 하면 좋겠지만, 돈을 받고 하면 일이 되고, 나처럼 즐거움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 취미이기에 참수리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으로 나뉜다.
요즘은 장거리 산행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고, 임도는 기피하는 터라서 여기가 낯설게 느껴진다.
지천에 놀거리가 깔려 있는 요즘 세상에는 개고생을 해야 하는 산행인은 확 줄었고, 자연스럽게 회복된 자연 속에서의 야생동물들은 경계심도 없어졌는지, 날지도 못하는 꿩 새끼들이 생존 본능에 퍼덕거리는데, 보호색으로 가만히만 있었으면 더 안전했을 것 같다.
인공 구조물인 계단이 기억을 되돌려 놓았고, 능선에 접어들며 꽃길이 펼쳐진다.
역설적이지만 등산을 하고자 찾아와서는 친구 덕분에 일상 운동하듯이 쉽게 능선에 올라 버렸다. 이제부터는 산보길인데, 산행이 너무 무덤덤할까 봐 바람이 거세게 불어 푸르른 숲을 마구 흔들어대며 환영한다.
문어가 알을 품을 때 알다발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다리로 부채질하듯, 대지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고 있어 상쾌하긴 하지만, 땀에 젖어 있는 나는 추워 동태가 될 것 같다.
날씨는 여차하면 비를 쏟아낼 듯, 눈이라도 뿌릴 듯이 잔뜩 흐려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백운산은 남도의 수장답게 듬직하여 잔망스러운 오르내림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나름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산철쭉의 분홍과 연보라색 꽃이 가냘퍼 보인다.
바람이 봄을 붙잡고서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산철쭉을 집단 괴롭힘이라도 하듯 마구 흔들어대고 있어, 보는 내가 힘들다.
요즘은 정맥꾼들도 드물어서 의지의 상징이기도 한 표지기조차 보기 힘들고, 시에서 매달아 놓은 등산로 리본만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데, 국토종주의 안내 리본만 같아 정감이 간다.
계절의 연속성에 봄꽃들은 피었다 지고 또 피어난다.
푸른 산하에는 버짐처럼 알록달록하게 꽃들이 피어나 있을 뿐, 초록은 동색이라서 내 마음도 새파랗게 물들어 가는 길이다.
참 좋다.
고요와 적막이다. 이 산속에는 새와 나밖에 없는 듯하다.
이렇게나 좋은데도 왜 여태껏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살아왔는지, 산과의 몰아일체가 되어 가면서 자책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신선대에 올라선다.
바람, 바람, 바람...
차라리 구름에라도 덮여 있었더라면 이름값이라도 할 텐데, 매몰차게 불어대고 있는 바람에 모자 단속이 급선무다. 바위 틈새에 철쭉꽃이 피어 있고, 상봉으로 흐르는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은 마치 도원경만 같아 신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톱니로 오를 수 없는 바위 군락지의 우회로가 바람막이가 되었고,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지고 땀이 솟는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봉이다.
얼마 전 친구가 전망 데크에 부식 방지용 페인트를 도포했다고 했는데, 신발의 접지력이 느껴질 만큼 끈적거림이 남아 있다.
흔들림 없는 상봉에 올랐으나 바람의 밀착 경호에 인증만 남기고는 바람의 눈치를 보며 주변을 조망한다.
초원처럼 무척이나 평온해 보이는 남사면과는 달리, 북사면에는 꽃들로 알록달록해졌고 정상부의 산철쭉은 바람을 타며 계절을 즐기고 있다.
정상을 내려와 조망터에서 섬진강을 바라본다.
진안군의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212km를 유유히 흘러온 강줄기, 하얀 모래톱을 따라 남해로 합수되는 풍경은 분수령을 가르는 정맥꾼들에게는 남도의 향수다.
푸른 물결이 출렁인다.
이 산속에서 망경평야의 보리밭을 거닐었던 서해랑길이 겹쳐진다.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잎이 매달려 녹음이 짙어졌고, 자연의 순환 속에서 꽃들이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 생명의 연속성이 경이롭고 역동적이기만 한데 나는 노쇠하여 다리가 아파 온다.
몸을 그렇게나 단련시켰으면 공중부양도 하련만, 자꾸만 지하로 파고들고 있으니 매번 바닥을 기고 있는 발가락이 아우성이다.
바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 발 아래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산은 백운암으로 인해 풍경화가 되었고, 총천연색의 자연의 밥상을 펼쳐 놓고서 편의점 김밥과 컵라면으로 요기를 한다.
그러고 보면 노동주를 겸한 반주용 막걸리조차 생각하지 못한 것은 몸이 받쳐주지 않아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 같아 씁쓸하다.
능선은 단순하다.
물에서 헤엄치듯 푸르른 숲속을 그저 걷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다.
시에다 쉼터 하나 만들어 달라고 민원을 넣었더니 감감무소식이다. 이건 아마도 마땅한 장소가 없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마냥 걷고 있다.
가끔씩 잡스러운 생각들을 끌어모아 근본 원인을 추적해 보지만, 느닷없는 잡생각일 뿐이고, 무상무념의 걷기에 점차 고도가 낮아지면서 길에 떨어진 꽃잎조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헬기장인 억불봉 삼거리다.
이른 시간이고, 이왕 산에 들었으니 억불봉을 다녀와도 되련만, 몸은 발가락을 인질로 삼아 하산을 요구한다.
매일 만 보 이상씩 걷고 수시로 산을 오르내리고 있어도, 조금 거리를 오버했다고 몸이 즉각 반응한다.
수련관 삼거리의 길목에 억불봉의 액자는 나무가 자라면서 그림이 미완성될 것 같고, 쉼터가 있는 삼거리는 야영장의 텐트 자리만 같다.
철쭉나무가 자라 터널이 되어가고 있고, 자그마한 오름도 힘에 겨워 겨우 노랭이봉에 올라선다.
무슨 바람이 종일 따라다니며 나를 쫓아내고 있지만, 꿋꿋하게 버티며 커피를 마시고 파노라마 속의 지나왔던 능선을 더듬는다. 어쩌다 보니 철쭉 구경도 못 해본 국사봉 능선상에는 광양만이 걸린다.
이제 동동마을까지의 내리막만 남아 있다.
이미 나무의 새싹들은 푸른 잎들로 성장하고 있는데, 갈색의 낙엽이 깔려 있는 내리막길이 위협적이다.
슬로프에서 스키를 타듯 자연스럽게 몸을 맡겨야 하는데, 뻣뻣하게 굳어 유연성을 잃어버린 몸으로 버티자니 종아리까지 아파온다.
에라이...
아무리 안 가려고 버텨 봐야 어차피 내려가야 끝이 나니, 제발 좀 가자...
행위가 진짜 힘이고 능력이다.
동동마을이 공동화되어 가고 있는데, 어째서 이곳에 마을회관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마을회관에 깃발이 나부끼고, 나무가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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